
25

민세희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가볍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희미하게 들리는 공기청정기 소리와 쾌적하게 조절된 실내온도, 은은하게 코끝을 맴도는 익숙한
방향제 냄새. 흰 커튼 사이로 서늘한 새벽 어스름이 새어 들어와 곤히 잠든 건우의 얼굴에 맺힌다.
모든 것이 어제와 같은 이곳은 두 사람의 침실이다.
평온한 건우의 옆모습을 보며, 세희는 두 사람이 무사히 현실로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이불을 들쳐 다리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인어로 변해가던 건우의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을 거라고. 손끝에 걸린
비늘을 보고 충격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라고. 건우는 이제 세희의 사랑이 없으면 숨이 멎어버릴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세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깊은 감정에 심장이 짓눌려, 가늘게 호흡하는 것이 세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고작 한 뼘. 아주 조금만 다가가도 건우에게 안길 수 있을 텐데 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니, 숨결조차 닿는 이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악몽은 끝났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세희는 온몸을 적신 무력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광기와도 같았다.
*
건우는 세희가 단순히 침대에서 늦장을 부리는 게 아님을 기민하게 감지해냈다.
정확히는, 세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 안에 흐르는 평소와 다른 기류를 알아차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 아내가 아파 간병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급한 건은 메일 쪽으로 따로 전달 부탁드립니다. "
세희는 눈을 감은 채 서재에서 들려오는 건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기운이 없는 것뿐이라고, 당신은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말해야 하는데. 무력한 몸뚱이는 그런 생각을 간신히 떠올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곧 안방으로 돌아온 건우가 세희의 옆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 식사는 늘 먹던걸로 괜찮아? 아니면 더 먹기 쉬운게 좋으려나. "
세희는 몇 번이고 입술을 뗐으나 그때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혀가 물에 젖은 솜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능한 한 분명하게 발음하기 위해 한참을 노력했고, 그럼에도 먹고 싶지 않다는 한마디가 고작이었다.
걱정스럽게 세희의 대답을 기다리던 건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 ……응. "
" 정말 병원에 안 가도 괜찮겠어? "
" ……괜찮아요. "
크고 두터운 손이 세희의 이마를 짚는다. 찰나의 순간, 미지근한 체온에 눈물이 핑 돌 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열은 없는데, 혼잣말하던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따뜻한 차라도 마시자. 당신이 좋아하는 거로 가져올 테니까……. "
" 건우씨. "
세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건우의 옷깃을 잡았다. 간신히 손끝에 걸린 옷자락이 약하게 당겨진다.
건우는 채 걸음을 떼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힘도 없는 몸짓과 희미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 중 어느 쪽이 건우를
멈추게 했을지는 모른다.
" 가지, 마요. "
어느 쪽이든 썩 중요하진 않았다.
" 안아줘요. "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민세희라면, 건우는 언제든 그 부름에 대답할 테니까.
건우는 여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 단단한 팔에 몸을 의지한 채, 세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닿은 천 너머로 규칙적인 심장 고동이 느껴진다. 여전히 폐부가 찬물에 젖은 듯 숨을 쉬기 어렵고 마음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으나, 건우의 온기를 나누어 받는 것만으로 기묘한 불안함은 차츰 씻겨나갔다. 말없이 세희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건우가 문득 물었다.
" ……나 때문일까? "
건우가 가리키는 '내'가 인어로 변해가던 모습을 일컫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순간 속마음을 들킨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조금 움츠리자, 건우의 손에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진다.
세희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건우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 아니요. 당신이 원한 게 아니었잖아. "
" 그래도……. "
"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건, 그러니까, ……사고 같은 거였고. "
" 당신 잘못도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
세희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던 건우가 세희의 표정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 당신과는 달라요. 당신은, 그냥 휘말린 거뿐이잖아요. 아무도 당신 탓을 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
" 세희야. "
" 나 뿐이었다고요, 거기서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 따위나 하고. "
" 그렇지 않아, 세희야. 날 봐. "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둘이서 영영 그런 곳에 갇히는 건 행복이 아니잖아.
더군다나 당신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고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처럼 차갑고, 그런데, 그런데도 다 포기하려고 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내가 어떻게……! "
세희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건우가 자신을 부르며 끌어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숨이 가빠 허덕이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볼썽사납게 버둥거리던 손발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건우는 그런 세희를 남김없이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 안에서, 세희는 덜컥 두려워졌다.
이상한 건 나야.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야?
건우는 이미 물 밖으로 빠져나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있는데, 저 혼자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만이 그 기묘한 공간에서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던 그때였다.
건우가 세희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꼭 말아 쥔 손가락을 펼치는가 싶더니 그 아래 드러난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희미하게 남은 칼자국 위로 몇 번이고 입술이 떨어졌고, 그때마다 세희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얇은 침묵 사이로 맨살이 스치는 소리가 스몄다.
" ……세희야. "
세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친다.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은 말로 다 못할 감정으로 얼룩져있었다. 나는 괜찮아요, 뒤늦게 변명하려 벌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건우는 그런 세희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손끝 가득 묻어나는 물기를 본 뒤에야, 세희는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 당신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
낮게 속삭인 말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눈가에, 뺨에, 턱밑에, 세희가 흘려내는 모든 감정에 남김없이 입술을 맞추던 건우가 마지막으로 흉터가 남은 손바닥에 키스했다.
" 그 증거가, 내가, 여기 있잖아. "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흔적.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증거.
그제야 세희는 마법에서 풀려나듯, 자신의 의지로 건우에게 안길 수 있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나를 놓지 마요.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줘요.
그럼 나는 견딜 수 있어.
그런 말들이 언어가 되지 못한 채 뚝뚝 떨어져 건우의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건우는 어떠한 것도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건우가 그러했듯 지금은 세희의 차례일 뿐이기에.
그렇게 서로 기대어 위로받는 하루가, 두 사람에게 더는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이 건우 & 민 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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