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누군가의 책상.
조금 낡고 먼지가 쌓여있는 이 책상은 주인을 잃은 지 오랜 시간이 흐른듯하나,
작고 여러 개가 나 있는 흠집과 주변에 쌓여있는 고문서와 마도서들로 인해 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책상에 있는 세 개의 서랍 중 가장 깊숙한 아래 칸에서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X월 X일
많은 이야기가 계절처럼 지나가는 게 안타까워 일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꾸준히 뭔가 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 일기도 소설이 아니니 구멍이 많겠지만 상관없다.
내가 기록하고 싶은 건 순간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생각에 절망했던
때와 멀어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어느 날 네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우리가 함께 지냈던 때…
내가 너를 되살려내고 네가 나를 선택해줬다는 게 환상이 아니라는 걸 기록하고 싶었다.
놀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기는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었으니까.
상처는 아물지 않겠지만 시간은 흘렀다. 참으면 나아진다는 말은 누가 했을까.
낫진 않았지만 익숙해졌다. 그래서 요리를 부탁했다. 아키치카는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 실력은 알고 있으니 거절해도 괜찮았는데. 괜히 내가 더 긴장됐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주방은 엉망이었다. 동생은 그걸 보고 말이 없다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저는 몰라도 누나는 먹어야 한다는 둥, 이러면 벌레랑 이웃한다는 둥… 내가 봐도 심하다 싶긴 했다.
특히 아키치카에게 보이지 않으려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녹슨 조리도구-어디에 썼는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굳은 피가 묻은 칼을 포함해서-가 찬장을 열자마자 쏟아졌으니까.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도우며 그 애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를 살리기 위해 해야 했던 많은 일들에
요리는 없었다고 말하는 대신 그냥 웃었다. 이 모든 게 기꺼웠다.
완성된 요리는 제법 괜찮았다. 아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았다. 요리 실력이 벌써 늘었나?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칼을 보니 생각난 게 있어서 아래에 할 일을 적어둔다.
X월 X일
아키치카에게 요리를 부탁하고 일기를 쓰는 중이다. 자신만만하게 요리를 시작했는데, 주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나쁜 예감이 들었지만 그 애가 뭔가 한다는 사실이 좋아서 가만있었다.
물론 못 먹을 게 나오면 굳이 먹을 생각은 없다. 아키치카도 나도 오래 살아야 하니까.
그때 이후로 몇 년이나 지났지만,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마을은 조금 조용해졌고, 다들 좀먹은 듯한
얼굴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있다. 인사를 하면 가끔 받아주기도 한다.
그걸로 됐다. 성격 좋고 오지랖 넓은 내 동생은 조금 신경 쓰는 것 같지만, 어쩌면 예전의 나도 분명
그 사람들을 신경 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아키치카에게 너무 많이 마음을 쏟았다. 그 애만 보며 살아왔다. 정상이 아닌 삶을 살았던 나는
균형을 잃었다. 타인과 타의를 잃어버리고, 대답 없는 죽음에 너무 많은 말을 쏟아냈다.
정상적이지 않은 걸까? 모르겠다. 그렇게 치자면 이미 내 동생은 정상이 아닌걸.
딱히 저 애가 나만 보고 살아줬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 집착할 만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내 동생에게 너무 많은 걸 줘버린 것이다.
되찾을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저 요리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키치카에게 이 일기를 보여줄 일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P.S. 요리는 최악이었다! 다음엔 더 잘하겠지?
X월 X일
아무래도 불안해서 함께 요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 다 그다지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먹은 죄로, 오늘의 식사도 엉망이었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둘이 같이 먹었다. 아키치카도 나도 울상이라서, 서로의 얼굴을 놀리다 웃었다.
하지만 타버린 냄비를 닦는 일을 누가 할지 정하다 다퉜다. 물론 불 조절에 실패한 건 나지만,
요리사면서 그걸 신경 쓰지 못한 건 아키치카 잘못 아냐?
결국 냄비를 버리는 걸로 합의했다.
X월 X일
아키치카의 옆구리를 찌르고-손가락이었다.-도구를 사 오라고 내보냈다. 내보내고 나서야 아차해
밖을 봤다가, 해가 이미 졌다는 걸 깨닫고 안도했다. 어느새 평범에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환상이었으면 너도 한 번쯤은 더 성공해줬으려나……?
X월 X일
오늘의 요리는 무척 맛있어서, 일기를 처음 쓴 날이 생각나 기록해둔다.
아키치카가 요리를 성공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첫날 꿈에 부풀어서 적어둔 것과 이후에 적어둔 내용의
분위기가 달라서 한참 웃었다. 그래도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게 나아지는 과정처럼
보여서 기쁘기도 했다.
일기를 쓴다고 말하자 동생은 무척 궁금한 얼굴을 했지만,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썼다는 자각은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나는, 내 동생이 죽은 후 다시 가을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기 위해 수많은 짓을 했다.
그 일들을 새삼스럽게 후회하지 않는다.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기억이 있든 없든 나는 아키치카를 위해
같은 일을 할 테니까.
나는 이제 기적이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걸 믿는다. 시간제한이 붙은, 어딘가 불온한 느낌이 든다 해도
이건 나의 기적이다. 아키치카의 기적이다.
내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은 무엇도 아깝지 않아서…….
<해야 할 일>
- 아키치카가 보기 전에 창고 안에 넣어둔 걸 처리할 것.
- 아키치카가 발견하기 전에 침대 아래에 넣어둔 상자를 버릴 것.
- 고문서와 마도서를 처리할 것.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돌아오니
신중하게
<해야 할 일>
- 식재료 조달
- 고문서와 마도서를 처리할 것
<해야 할 일>
- 고문서와 마도서를 납득시킬 것. 아키치카가 자꾸 의심하잖아.
- 새 냄비를 사 올 것.

이후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